인간 찬가 튜토리얼

Posted on February 16, 2024

인간 찬가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노인과 바다> 에서 헤밍웨이는 말한다.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고.

A man can be destroyed but he cannot be defeated.

–Ernest Hemingway, The Old Man and the Sea

그런가 하면, 이런 인용문도 가능하다.

자네는 비겁자가 아니네. 왜냐하면 아직 자네는 포기하지 않고 거기에 서 있으니까. 아는가? 빛을 향해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려 하는 한, 인간의 혼이 진정으로 패배하는 일은 결코 없다네.

크라우스 V. 라인헤르츠, <혈계전선>

지금은 다양한 평론에서 엿볼 수 있는 단어지만,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작품이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필자도 애용하는 이 단어의 출처를 알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 된다.

용기란 무엇인가! 용기란 두려움을 아는 것! 공포를 내 것으로 삼는 것이다!

인간의 찬가는 용기의 찬가! 인간의 훌륭함은 용기의 훌륭함! 아무리 강해도 이 좀비들은 용기를 모르지! 벼룩이나 마찬가지다!

윌 A. 체펠리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치일지 모르나, 주류 문학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만화나 서브컬처 계열의 작품이 이러한 인간 찬가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이는 꼭 상업성과 연관이 있다고만은 하기 힘들 것이다. 인류가 자기변호적 논리를 펼치고 그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얼핏 속물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존재이든, 말마따나 길가에 핀 한 송이 꽃이라도 그 자신의 숭고함으로 존재 증명에 다다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며, 이는 다종다양한 패러미터와 관점에 상관없이 모든 존재 그 자체의 성립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따라서 인류가 자신들 나름의 고상함을 추구하며 이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속물적이기는커녕 그것이야말로 숭고함의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보면, 등장인물 윌 A. 체펠리의 입을 빌어서 작가는 말한다. 용기는 두려움을 “아는 것” 이며, 공포를 “내 것으로 삼는” 것이라고. 결코 공포를 억누르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적응하는 존재이며, 공포를 분석하고 이를 받아들여서 이해할 때 비로소 공포를 뛰어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찬가와 오웰리안식 전체주의의 결정적 차이점이자 분기점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자가적 선택으로써 공포를 해석하고 뛰어넘는 것이다.

2022년에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는 그 서울대학교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그렇다.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 찬가적 요소들의 집합은 사회의 입장에서 유용한 요소들의 집합과 많은 부분에서 겹치는 듯하다. 하지만 위 연설문에서 필자가 발췌한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전문을 필자의 방식대로 해석하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의 입장에서 뭐가 유용하건 말건, 자신 나름의 인간 찬가를 써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한 언어적 능력, 존재 증명에 필요한 문해력이 구축된 뒤에야 사람은 사회에 공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말로 구성된 존재이며, 이토 케이카쿠 (伊藤計劃) 의 작품 <죽은 자들의 제국> 을 인용하자면 “사고는 언어에 선행하”며, “언어가 있기에 마음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정하고 계획하기 전에 필연적으로 기호적이며 언어적인 사고를 수행한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수많은 허구와 픽션들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그들 중의 일부나마를 현실에 적용되게 만든다.

그런 것이라면 우리들 모두, 제각각 알고 있는 가장 멋진 이야기를 그 인생으로 써 내려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두의 인생이 그 장르에 상관없이 즐거운 글쓰기가 되기를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