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npanya와 일상 미스터리와 수학

Posted on February 17, 2024



“I do not know what I may appear to the world, but to myself I seem to have been only like a boy playing on the sea-shore, and diverting myself in now and then finding a smoother pebble or a prettier shell than ordinary, whilst the great ocean of truth lay all undiscovered before me.”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Sir Issac Newton

여러분은 판판야 (panpanya) 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만화가를 알고 있는가?

정체불명이라 함은, 딱히 필명을 쓰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창작인들의 역사는 실명을 사용한 전례가 드물 정도로 익명의 작가, 화가, 만화가, 그리고 프로그래머들이 난무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panpanya의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작가의 정체를 궁금해하게 만든다. “대체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지?” 라든가.

panpanya의 작품은 이미 대한민국 안에서도 알 사람은 아는 작품이 되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한국의 출판사에서 그의 신작들이 꽤 빠른 속도로 발매되고 있으며, 이는 작가의 숨은 팬들이 많음을 유추하게 한다. 필자도 이 작품의 광적인 추종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어떤 점이 그리도 매력적인 것일까.

먼저 작품의 흐름과 그 관점을 들 수 있겠다.

일상

시리즈의 세계관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장이 모 블로그에 이미 있는 듯하여 발췌해 보았다.

소녀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소녀가 바라보는 시야엔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형의 관념들일 때가 많다. 그것은 작가의 단상이 개입된 세계로 작가는 소녀를 통해 소소한 일상과 사물을 통해 자신의 사념을 반영하고 있다.

–마녀가 가르쳐 준 세상

이것은 필자가 오래 전부터 즐겨 왔고, 제 인생의 법칙에도 적용해 왔던 “일상 미스터리” 와 어떠한 면에서는 그 궤를 같이한다. 일상 미스터리라 함은 일반적으로 녹스의 10계를 어느 정도 오버라이드하는, 추리의 인간적 효과보다 말 그대로 일상 속 수수께끼 자체에 집중하는 장르이다. 이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코지 미스터리 (Cozy Mystery), 혹은 해리 캐멜먼의 안락의자 탐정 (Armchair Detective) 스타일의 작품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기서 새로운 세대의 작품계인 일상계 미스터리가 일본에서 탄생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요네자와 호노부 (米澤穂信) 씨가 <고전부 시리즈>, 그리고 <소시민 시리즈> 를 집필함으로써 그 개념을 세계적으로 정착시켰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일상 미스터리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자극적인 극중 장치를 최대한 배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자극하게 되는 내용에서 상당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좋은 일상 미스터리를 쓰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충격적인 플롯과 쇼킹한 사건 없이도 지속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며, 동시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에 그 닻을 내린 이야기를 집필하는 것은 일반적인 필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라 본다.

이러한 내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위 인용문에서 가리키는 무형의 관념 이다. 일상 미스터리를 즐기기 위해서는 독자 또한 다소의 노력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보지 않고 한 단계 추상화시키는 과정이 포함된다. 심플하게 눈앞에 있는 이야기의 자극성을 추구한다면, 일상 미스터리의 표층적 이미지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 지루해 보이는 표층을 뚫고 진정한 즐거움을 맛보려면,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야기를 메타포로써 받아들이고, 그 뒤에 있는 무형의 관념을 –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적용되어도 그 대칭적 구조는 유지되는 아이디어를 –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panpanya의 작품은 일반적인 일상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존재한다. 그 세계관 자체가 핍진성을 다소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초현실적인 작가의 개입을 허용하고 있어서, 통상의 장르에서는 시도해 볼 수 없는 다양한 if의 세계가 실험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도라에몽의 “만약에 박스” 를 연상하게 한다.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앞머리에 붙여둔 아이작 뉴턴의 말을 곱씹어 보자. 뉴턴은 바닷가에서 비교적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질을 찾고 기뻐하는 소년에 자신을 비유했다. 매끈한 돌과 예쁜 조개껍질을 앞에 두고 당신은 어떤 사실들을 떠올리는가? 음, 어른의 세계에서 단기적으로 유용하지 않다는 공통점은 어떨까? 왜냐하면 어른의 세계에서 어떤 개념이나 객체가 단시간에 유용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이해받은 패러미터 안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으로 고평가를 받은 무언가는 장기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지금 당장 현존하는 기술과의 비교를 무리하게 수행함으로 그 우월성을 증명하려다 역으로 발전 방향이 폭주하여, 효과는커녕 역효과를 불러오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부화하지 않은 달걀을 고층에서 낙하시켜 그 조류로써의 비행 능력을 검증하려는 행위와 비슷하다.

panpanya의 작품은 이러한 달걀이 보는 세상을 (여기서, 본다 함은 딱히 생물의 시각적 인식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또는 그 달걀의 부화를 기다리고 지켜보려는 어린아이의 심경을 특유의 섬세한 배경과 그에 대비되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등장인물들로 나타낸다. 뉴턴이 말했던 어린아이가 보는 바닷가는, 바로 이 작품의 그것과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진행은 대체로 느긋하며,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 목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눈앞의 객체에 대한 순수한 의문과 호기심뿐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정 또한 일상 속의 자그마한 모험들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규명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결과보다는 그 실패까지의 즐거웠던 과정을 돌이켜 보며 새로운 수수께끼를 발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낙담할 필요 없다.

오늘은 운이 없으니 볼일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범위 안이었다.

–재수 없는 날 보내는 법, 「동물들」, panpanya

그러니 여러분, 낙담하지 말라.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으며, 그 과정이 괴로워야 할 이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여러분이 괴롭다면, 그것은 당신 주변의 인격체들이 탐구 과정에서의 실패를 과정이 아닌 결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의 공통적 인식에 공감할지 말지는 당신이 정할 문제이다.

닫는 글:「자가 격리 기간의 선형 대수」

이 신비로운 세계관을 탐험하던 도중, note에서 재미있는 포스트를 읽게 되었다. <panpanya 『아시즈리 수족관』 : 천재의 기원> (원제: 「panpanya 『足摺り水族館』 : 天才の原点」) 인데, 다른 북 리뷰들과 달리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다. 그 제목은 무려「자가 격리 기간의 선형 대수」(원제: 「自己隔離期間の線型代数」) 라고 한다. 오호라. 이건 눈이 번쩍 뜨인다.

포스트를 좀더 자세히 읽어보았다. 저자는 “일본을 대표하는 공리적 집합론 연구자인” 후치노 사카에 (渕野 昌) 교수라고 한다. 어라? 그렇다면? 하면서 이런저런 페이지를 뒤져보니, 맙소사, 무려 에르되시 번호 2를 가진 수리논리학자다. 최고다. 지은 책 목록을 보니 <Emacs Lisp로 만든다> (원제: 「Emacs Lispでつくる」) 가 있다. 여기서 첨언하자면 필자는 자기소개 페이지에 “영원한 수리논리학자 꿈나무를 표방하고 있는, 우당탕탕 이맥스 유저” 운운하는 글을 2024년도 기준으로 한글 지원까지 해가며 써 두었다. 이쯤 되면 이 책들을 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