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사전적 의미는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이다. 맞는 것 같다. 일상이란 사건의 연속이 반복되는 하루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보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놀람 (즉 정보량) 이 적은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느 개념들이 그렇듯이, 일상을 어떤 기준에서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함의는 달라진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수를 보는 것 같다. 모든 것은 그 기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러한 선형 변환 속에서도 기투성이 유지되는 하나의 고유 벡터를 찾는 것이 바로 개념의 정의다. 전선에 나가 있는 병사의 일상과 대학생의 일상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 분모가 존재하는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 “곁에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물론 이것은 사전에 정의된 거리 공간이 있을 때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근래에 들어서 가속화되고 있는, 거리 공간의 점진적 붕괴가 일상의 정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우리는 저녁에 잠들고 아침에 일어난다. 우리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다. 아니, 큰 변화가 없는 반복성이야말로 일상이다. 아침에 일어나 칫솔을 건조기에서 꺼내 이를 닦고, 차를 마시고, 아침을 먹는다. 이것들은 모두 사물들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이 “곁”은 꽤나 까다로운 개념인데, 거리뿐이 아닌 시간도 이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금고 속에 잠겨 있는 찻잔은 나쁜 접근성을 가지고 있다. 곁에 있는 것이 사람일 때 이 현상은 훨씬 더 알기 쉽게 나타난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는, 지금 당장 말을 걸 수 있다 하더라도 멀리 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곁에 있음”은 1) 당신의 행동에 빠르게 반응하는 것, 그리고 2) 그 반응이 당신의 논리 체계로 납득 가능한 범위 안에 있을 것이라는 복수의 조건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인간보다는 언제나 사물의 곁에 더 가까이 있다. 우리가 걸치고 있는 의복부터가 그렇다. 우리는 옷을 입었고, 그 옷이 필요한 기능을 해 줄 것이라고 신뢰하며, 이는 통계적으로 기대값을 배반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당신이 인간의 사고 및 정신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이것은 아직 상대적으로 복잡도가 높은 대상이다. 따라서 일상은 곁에 있는 것들이 많을수록, 또한 그 복잡성이 해명될수록 구체화되고 단단해진다. 어떤 사람이든 그 곁에 있는 사람이 적다면, 그 대용으로, 주변의 많은 사물과 관계를 깊이 맺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인간 정신은 우리가 만들어낸 주변 사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복잡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이 단순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안전 보장 (말하자면 일상 보장, 즉 복지 차원의 의무적 국가 보험) 을 위한 사회계약에 의해 그 복잡성의 표출이 다소 마스킹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물의 단순한 양태에 큰 매력을 느꼈고 이것이 그들의 일상을 좀더 효율적으로 유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구가 탄생했다. 하지만 도구의 단순성은 그 사용자들을 외롭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일상을 구체화하는 것은 복잡성의 해명 과정 그 자체이지, 과정 완료의 표시등으로써 기능하는 해명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도구를 더 많이 만들거나, 그것들을 합친 더 크고 복잡한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시점에서 그 노력은 대형 언어 모델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보상받고 있다. 하지만 예견된 딜레마 또한 함께 찾아왔다. 언어 모델과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우리는 복잡도에는 두 가지 형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첫 번째는 외부와의 관계로써 정의되는 복잡성이며, 두 번째는 내면의 것이다. 인공지능의 함의는 극도로 단순화시킨 외부 관계로써의 복잡성과 (언제나 일정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답변하는), 반대로 복잡화시킨 내면의 구조 (그 뒤에 있는 웹 스크레이핑 데이터와 그 학습) 에 있다.
인간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형식을 연동시키는 경향이 있다. 인간뿐 아니라 사물도 그러하다. 내부의 작동 구조가 복잡한 사물은 언젠가 반드시 외부적으로 예상 밖의 행동을 취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구를 점점 복잡하게 만들었다. 도구가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내부에 저장하고, 단순한 외부 인터페이스로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간에서 항상 입에 올리기 좋아하는 “효율” 이다. 하지만 효율을 위해서는 상술했다시피 내부 구조가 외부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복잡해야 하고, 이는 그 도구의 사용자들에게 해명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는 물론 일상의 구체도 및 해상도를 떨어뜨린다. 그 도구가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행복은 반복의 욕구” 라고 말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이상, 어쩔 수 없이 반복적인 일상 (그 이상적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을 쫓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행복을 위해 그 곁에 많은 것을 두고, 그것들이 매일매일 비슷한 행동을 자신에게 보여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보여주기” 및 “보기”는 그 추상화 과정에서 생략되었을 뿐, 엄연히 상호적 행동이다. 우리는 웹 페이지를 “본다”, 즉 순수히 거기에 있는 것을 우리가 선택하여 그 시선을 향했다고 생각하지만, 웹 서버가 우리에게 데이터를 보내는 과정은 쉽게 잊는다. 우리가 보기 위해서는 그 대상 또한 보여질 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상이 보여질 수 있는 상태에 있도록 돕는, 즉 “잘 보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접근법의 문제다. 어둠 속의 사물을 잘 보려면 적절하게 랜턴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하며, 웹 페이지를 잘 보려면 적절한 요청을 보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잘 보려면 적절한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화는 캐치볼이라기보다는 스쿼시 게임에 가깝다. 이 적절성은 흔히 질적 문제로 해석되기 쉽지만, 양적 문제 또한 포함하고 있다. 대상이 우리의 빛을 해석하여 반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반복해서 언급되는 복잡도와 직결된다. 여기서 관점을 전환하여 그 대상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요청/질의는 단순하고 양이 적을수록 이루어지기 쉽고, 따라서 단순한 요청 및 질의를 많이 하는 인간은 효율성 측면에서 선호된다. 그 입자를 받아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효율성을 제 1가치로 둘 수 없다. 왜냐하면 효율성은 어떠한 상위 가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유일한 해법은 효율성을 위한 효율성과 같은 재귀적 관계가 되는데, 우리는 이 해법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지겹도록 경험한 바 있다. 그렇다면 효율성보다 상위에 위치할 수 있는 어떠한 다른 가치를 하나 뽑아, 그 렌즈로 보았을 때 질의의 복잡도가 어떠한지 보아야 한다. 대립적인 관계를 위해 /앎/을 들어보자. 더 많은 앎이 제 1가치일 때, 단순한 질의를 많이 하는 인간은 효율성의 측면에서만큼 자주 선호되지 못한다. 누군가의 질의 또한 어딘가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그 질문자에게 반사된 것이기에, 우리는 그 질의 내용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질의만을 던지는 사람은 앎의 경제학으로 본다면 선호되지 못한다. 그 단순한 정보가 간단한 지식을 즉석 제공할 수는 있겠지만, 앎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앎은 최종 상태일 뿐 아니라 그것을 향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삶의 마지막 결과가 죽음이며, 삶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태이지만 우리는 삶에도 죽음만큼 큰 의미를 둔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게임 「산나비」에 나오는 대사를 들 수 있겠다.
모두에게나 끝이 공평하게 찾아오는 법이라면.. 끝까지 가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란다. 중요한 것은..어떻게 끝까지 가는가.
우리는 좌표 평면과 행렬로 벡터를 표현하지만, 우리가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던 방향의 개념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표현과 존재는 이 경우 별개의 것이다. 따라서 벡터가 향하는 좌표를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방향 자체는 엄연히 존재한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물론 앎 이외의 가치들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일상의 구체도와 안정성에 직결되는 관계는 일방적으로 보고 보여지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닌, 그 과정이 상호적으로 이루어지는 (질문과 답변의 경계가 모호한) 친구의 관계다. 물론 그 친구는 사물 및 개념일 수도, 인간 정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상호성을 위해서는 상술한 방향성의 공유 및 덧셈이 중요해진다. 이를 위해 좌표의 도움이 필요할 수는 있으나, 방향의 기투성이 위치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것, 목적과 시작점의 좌표는 시작과 끝을 모르는 인간이 방향성을 가늠하기 위한 랜드마크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