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의 관념 / 아시즈리 / 新物館

Posted on August 9, 2024

지난 겨울, panpanya의 만화에 대한 서평에서 나는 무형의 관념 에 대해 수차례 언급한 바가 있다.

소녀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소녀가 바라보는 시야엔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형의 관념들일 때가 많다. 그것은 작가의 단상이 개입된 세계로 작가는 소녀를 통해 소소한 일상과 사물을 통해 자신의 사념을 반영하고 있다.

ipari67 (“판판야(Panpanya)의 작품들,” 2023)

이러한 내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위 인용문에서 가리키는 무형의 관념 이다. 일상 미스터리를 즐기기 위해서는 독자 또한 다소의 노력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보지 않고 한 단계 추상화시키는 과정이 포함된다. 심플하게 눈앞에 있는 이야기의 자극성을 추구한다면, 일상 미스터리의 표층적 이미지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 지루해 보이는 표층을 뚫고 진정한 즐거움을 맛보려면,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야기를 메타포로써 받아들이고, 그 뒤에 있는 무형의 관념을 –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적용되어도 그 대칭적 구조는 유지되는 아이디어를 –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그 무형의 관념이라는 것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고 싶어진다. 관념이란 애초에 무엇이고, 무형의 관념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첫 번째 인용을 보면, 작가의 단상이 개입된 세계를 무형의 관념이라 칭하고 있다. 단상이라 함은 단편적인 생각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작가는 그 자신의 단편적인 명제들을 – 생각이 곧 명제인지는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고 – 선택적으로 주입시킨 그 무언가를 작품에 투영시키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것은 블랙박스여야 한다. 바르트가 누차 언급하듯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저자의 논리적 죽음 (이 개념은 반-바지 작가의 만화 「슈뢰딩거의 고양희」 에서 빌려왔다) 을 이루어 낼 수 있는 한 방법은 바로 블랙박스적 난독화다. 따라서 저자의 죽음은 곧 저자의 신비화, 난독화다. 신비화된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 좋을 대로 인용하고 해석하지만, 결코 그 신비의 기관마저 해석해 버려서는 안 된다. 해석된 신비는 일점으로 수속되어 죽어 버리고, 본질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규명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될 가능성 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즉 최종 상태에 다다른 유한 상태 기계 (FSM) 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신비의 시체다. 애시당초 신비의 해석은 수목구조적인 폭력을 수반한다. 하나의 해석을 확정짓기 위해 다른 모든 해석들을 파괴하려 드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말하듯, 하나의 원리가 승리하도록 하자면 또 하나의 원리를 타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승리에 대한 요구는 재귀적이다.

이러한 파괴적 진실 규명에는 물론 기준점이 필요하다. 하나의 뿌리에 카메라를 잡고, 그 렌즈에 조사되는 그림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그러한 관점은 오랜 기간 여러 가지 관념의 영향을 받아 왔지만, 근대 이래의 수목적 종교라 하면 하부구조를 자칭하는 관념들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 시대의 광신적 사랑을 받는 종교, 즉 현실이라 불리는 렌즈이자 플라톤적 동굴의 또 다른 이름이다.

죽어 버린 신비는 편히 잠들지 못한다. 그것은 기존의 뿌리에 병합되어 마리오네트로 전락한다. 얼마나 많은 전쟁기계들이 세간의 /빛/을 보기 위해서, 자신의 빛인 탈주선을 잃고 전용détournement 되는지!

그렇기에 우리는, 상술했다시피 저자가 그 자신의 단편적인 명제들을 작품에 투영시키고 있는 사실을 알지만 그 명제들이 무엇인지는 몰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시점의 인공적 다각화를 꾀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저자와 둘만이 존재하는 세계정신 속에서 영지식 증명 게임을 하는 셈이다. 저자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전하려 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사실의 정합성을 분해된 개별 명제들보다 우선해서 판단하게 된다.

차이와 반복

이러한 영지식 증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는 매번 미묘하게 달라진다. 그 차이가 바로 증명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모든 독서는 유일무이한 경험이다. 재독이 중요성을 가지는 이유다. 그 차이 속에서 태어나는 관념 또한 그 독자만의 것이다. “2. 삶의 각각의 측면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들은 공통의 흐름 속에 융합된다. 그 흐름 속에서 삶의 통일성은 다시는 재건될 수 없다.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G. Debord)” 이것은 카산드라적 예언이라기보다는 자연현상의 기술에 가까운, 보기보다 중립적인 명제이다. 그것은 어떤 타인의 관념과도 결합될 수 있지만 온전히 그 정보를 손실 없이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순간 지식의 소규모적 재생산이 발생하며, 독자는 한순간 저자의 편린이 된다. 그것은 클로드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 (하단 이미지) 처럼 이어지며, 저자와 독자는 모두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작용하기 시작한다.

사건의 존재론

가령 현재의 쓰레기가 시간이 더해져 현재와 다른 가치가 쌓이게 되는 과정이나, 한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용도 폐기되는 과정들을 우화처럼 그려낸다.

ipari67 (“판판야(Panpanya)의 작품들,” 2023)

Panpanya는 그런 면에서 탈영토화의 만화가라 할 수 있다. 그의 만화를 읽다 보면,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물들이 급격히 귀엽고 친근한 형태를 띠거나, 반대로 기괴하고 코스믹 호러적인 행태를 보일 때가 있다. 그러한 성질은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캐릭터에 대비되는, 극도로 치밀하지만 원근법을 무시하며 흔들리는 배경이라는 기제를 통해 더욱 강조된다.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계는 급작스레 주인공을 이방인으로 만들고, 그 불안과 초조는 극대화된다.

‘지하 여행’의 중반부에서부터 주인공은 조력자인 돌고래에게 길안내를 받는데, 돌고래는 주인공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공이 돌고래로부터 공포감을 느끼는 순간, 돌고래는 배경과 같이 세세하게 묘사됩니다. 주인공의 내면에서 돌고래는 의지할 만한 길잡이에서 무섭게 하는 존재, 배경과 같이 낯설고 무서운 대상으로 탈바꿈한 것이며 이에 맞추어 묘사 방식도 바뀐 것입니다. 마지막 컷에서 주인공은 공포감을 해소하고자 손을 잡아달라고 요청하고, 이에 돌고래는 수락하며 다시 친근한 존재로 바뀌고, 묘사 방식도 단순하게 돌아가는 것을 통해 판판야가 자기 만화 기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륜 (상단 이미지 출처) (“단순한 인물, 세세한 배경의 조화,” 2018)

그러한 탈바꿈과 묘사 방식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날 때, 그것은 고정된 존재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의미 이전의 발현” 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면, 발현 자체를 그것에 후행하는 어떠한 명제의 증명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상술한 저자의 죽음, 즉 선행하는 명제라는 줄무늬 (홈) 의 해체와 연관되어 있다. 또한 그곳에서 태어나는 불안과 초조에는 기능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직접 도달할 수 없는 세계-자체에 대한 사유 방식의 일종이다. “‘공포’는 우리-없는-세계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려는 비철학적 시도라는 것이다 (새커, n.d.)”. 이방인이 되는 주인공은 자연스레 사물들 간의 코드화된 관계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독자들에게 이것은 텐서곱과도 같은 탈주선을 그릴 수 있는 욕망의 추진력을 지닌 연산자, 즉 공간과 잠재태를 입력받는 함수로써 기능한다.

Panpanya식 상황주의

Panpanya의 작품은 도시구획의 저변에 깔려 있을지도 모르는 의도에는 관심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부 구조에 대한 압도적 무시가 이 작품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키사라기 역은 존재하지 않지만 어쨌건 내릴 수 있는 역이며, 이는 심리지리psychogeography 와 무관하지 않다 (O’Rourke, 2021). 심리지리적 기법에 입각하여 지도를 그리기 시작하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히 간선vertex 들이 자주 교차하는 구획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실체와 관계없이 그곳에 존재한다. 키사라기 역은 이렇게 심리지리적 그래프 구조의 기하학적 필요에 의해 출현한다.

이것은 그래프 전체에 있어서 일종의 보틀넥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의 동명의 작품 속 주인공은 시스템의 성능을 저해하는 보틀넥에 자신을 비추어 본다. 그런데 보틀넥이 많은 다른 간선들에 연결되어 있다면, 그것 또한 길이가 짧은 간선에 불과하지 않은가? 요네자와가 묘사한 절망적인 청춘의 잠재적인 해답은 보틀넥의 제거라는 측면에서는 합당할지 모르나, 그 작품 전반에 은은하게 깔려 있는 자폐적 순환과 열린 결말로 인하여 수많은 독자가 연상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파괴적 해법은 그곳에 마침표를, 점을 찍게 만들고, 그 점은 재귀적인 보틀넥 생성으로 이어질 뿐이다. 좀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당신의 심리지리적 간선을 연장하고, 차원을 추가하고, 탈주하여, 점점 거시적으로 반-보틀넥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요네자와의 다른 작품 「고전부 시리즈」의 말을 빌리자면, “손은 어디까지고 뻗을 터”.

Cover of Guy Debord's 1957 “Psychogeographic guide of Paris."

텍스트 “판판야, 잃어버린 세계의 노스탤지어 (주슬아, 2025)” 는 그러한 공간들이 마크 오제의 비-장소non-lieux 개념과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비-장소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두 가지 시점을 떠올릴 수 있겠다. 하나는 초근대적 줄무늬판(비-고른판, 조직판)de non-consistance 의 변종이며, 다른 하나는 고른판plan de consistance 이기는 하나 탈코드화만 있고 생성은 없는 일종의 실패한 고원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저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잠복하고 있는 작품 속 유목적 전쟁기계들에 주목할 가치가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세계」의 신물관 이 그러한 기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시즈리 수족관」도, 「새로운 세계」도,「이노센트 월드」도 분명 비-장소와 맞닿아 있으나, 비-장소 그 자체는 아니다. 기관 없는 신체의 잠재태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크립티드가 잠들어 있는 호수의 잔잔한 표면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드보르는 스펙터클에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Panpanya는 관심도 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줄 수도 없다. 그곳에 잠재된 공포와 압도의 철학은 공통의 언어를 거부한다. 항로와 홈을 충분히 새겨서 줄무늬판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그 수면을, 수많은 마리오네트 잎사귀들, 죽은 신비들이 건너다닌다. 하지만 그 수면 밑에는 어떠한 떼거리들이 기어다니고 있다. 그들은 마리오네트의 항로와 언어를 알지 못하는데, 바로 그 사실이 그들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이리하여, 만화는 지극히 평화롭고 소박한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유물론적 상품화에 손 한 번 대지 않고 기괴한 공격을 가한다. 이는 몇몇 일본 작품들의 특기분야이기도 하다. 당신이 만화를 읽으면서, 분명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러브크래프트적인 섬칫함을 느낀다면, 바로 그 공격이 당신에게 본능적 위화감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리라.

여기서 돋보이는 무관심의 철학은 돌려 말하기의 파괴적 특성과 닮았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매우 슬펐다고 묘사하기보다, 그 거꾸로 신어 버린 신발을 비추는 것이다. 듣는 이가 해석하는 만큼 사고적 품이 드는, 비교적 원자화되지 않은 명제들은 일단 해석되면 그 씹고 소화시킨 과정 탓에 기억에 더 깊이 남는다. 그림자가 강하다는 것은 빛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anpanya는 도시산책자일까? 그것은 정의에 따라 다를 것이다. 도시 속을 느긋하게, 중대한 목적 없이 떠돈다는 최소한의 정의를 적용한다면 도시산책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눈이 보고 있는 것은 도시의 저변에 깔린 인간들의 의지와 관념이 아니다. 그 만화에서 주인공 이외의,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들은 그 얼굴이 소화전, 파이프 등의 사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그 모든 것이 도시의 기계적이고 신체적인corporel 일부로 환원되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면에서 Panpanya는 도시 속을 걸으면서도 그 도시를 위에서, 바깥에서 부감한다. 그것은 마치 도시 밖의 골목을 따라 걷는 것과도 비슷하다. 캐릭터와 배경의 지속적인 괴리는 이 가설을 좀더 확실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게 Panpanya의 상황주의는 도시를 표류dérive 하는 것을 넘어, 아예 새로운 현실을 도시 외곽과 사각지대에 구축해 버린다. 그것은 스펙터클을 피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다. 작품에 수없이 등장하는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가 좋은 예시다.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는 일본에서 실존하는 상품이지만, 만화 속에서 그 상품적 요소는 비웃듯이 무시된다. 마치 특정 지역에서 출몰하는 미확인 생물체나 다름 없는 묘사가 상품 위에 덧씌워진다 (해당 제품은 필자도 찾아다니다가 포기한 사례가 있다. 새벽 1시에 만화를 읽다가 공업 단지 어딘가에 위치한 데일리 야■자키를 찾으러 집을 나섰던 것이다. 결국 찜케이크는 찾지 못했다). 상품의 논리는 초등학생들의 츠치노코 찾기 같은 놀이적 구조로 대체된다. 산책 중에 발견한 것들은 텍스트화된 신비로써 기능한다. 이것은 상품을 텍스트로 전환시키고, 인간을 구조로 환원시키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도시를 텅 빈 외곽에서 다시 부풀리는 기묘한 상황주의이자 가장 소박한 초월주의로써의 전용이다. 만화에서 현실은 전복되지 않으며, 오직 창출될 뿐이다.

정리

작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무형의 관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텍스트로부터 유추할 수 있으나, 애초에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기계는 명제의 구조 속 어딘가에 잠복해 있으며, 그것은 세계의 논리적 형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텍스트 구조 속에서, 확률공간 속을 기어다니다가 독자의 해석이라는 반복적 사건을 통해 잠깐잠깐 출현한다. 이 출현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이루어지는 차이의 증명이다. 따라서 panpanya의 만화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침묵으로 지키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무형의 관념을 반복과 차이를 통해 독자에게 증명해 보이는 하나의 영지식적 예술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 그 그림은 현실과 논리 형식을 공유하지 않는 불완전한 그림이다. 이때 관념은, 명제로서 표현되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론적 무게를 가지는 감응의 잔상이다. 더 나아가, 그 차이와 반복 자체야말로 우리가 논하는 무형의 관념에 가장 가까운 것이리라.

참고문헌

O’Rourke, K. (2021, July 16). Psychogeography: A Purposeful Drift Through the City. The MIT Press Reader. Retrieved from https://thereader.mitpress.mit.edu/psychogeography-a-purposeful-drift-through-the-city/
단순한 인물, 세세한 배경의 조화. (2018, December 5). 륜. Retrieved from https://iamlyun.tistory.com/entry/%EB%8B%A8%EC%88%9C%ED%95%9C-%EC%9D%B8%EB%AC%BC-%EC%84%B8%EC%84%B8%ED%95%9C-%EB%B0%B0%EA%B2%BD%EC%9D%98-%EC%A1%B0%ED%99%94
새커. (n.d.).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 유진 새커. 필로소픽. Retrieved from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153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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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판야(Panpanya)의 작품들. (2023, February 18). 네이버 블로그 | 마녀가 가르쳐 준 세상. Retrieved from https://blog.naver.com/ipari67/223020095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