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의 관념

Posted on August 9, 2024

<작업중>

지난 겨울, panpanya의 만화에 대한 서평에서 나는 무형의 관념 에 대해 수차례 언급한 바가 있다.

소녀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소녀가 바라보는 시야엔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형의 관념들일 때가 많다. 그것은 작가의 단상이 개입된 세계로 작가는 소녀를 통해 소소한 일상과 사물을 통해 자신의 사념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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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위 인용문에서 가리키는 무형의 관념 이다. 일상 미스터리를 즐기기 위해서는 독자 또한 다소의 노력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보지 않고 한 단계 추상화시키는 과정이 포함된다. 심플하게 눈앞에 있는 이야기의 자극성을 추구한다면, 일상 미스터리의 표층적 이미지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 지루해 보이는 표층을 뚫고 진정한 즐거움을 맛보려면,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야기를 메타포로써 받아들이고, 그 뒤에 있는 무형의 관념을 –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적용되어도 그 대칭적 구조는 유지되는 아이디어를 –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그 무형의 관념이라는 것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고 싶어진다. 관념이란 애초에 무엇이고, 무형의 관념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첫 번째 인용을 보면, 작가의 단상이 개입된 세계를 무형의 관념이라 칭하고 있다. 단상이라 함은 단편적인 생각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작가는 그 자신의 단편적인 명제들을 – 생각이 곧 명제인지는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고 – 선택적으로 주입시킨 그 무언가를 작품에 투영시키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것은 블랙박스여야 한다. 바르트가 누차 언급하듯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저자의 논리적 죽음 (이 개념은 반-바지 작가의 만화 「슈뢰딩거의 고양희」 에서 빌려왔다) 을 이루어 낼 수 있는 한 방법은 바로 블랙박스적 난독화다. 따라서 저자의 죽음은 곧 저자의 신비화, 난독화다. 신비화된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 좋을 대로 인용하고 해석하지만, 결코 그 신비의 기관마저 해석해 버려서는 안 된다. 해석된 신비는 일점으로 수속되어 죽어 버리고, 본질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규명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될 가능성 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즉 최종 상태에 다다른 유한 상태 기계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신비의 시체다. 애시당초 신비의 해석은 폭력을 수반한다. 하나의 해석을 확정짓기 위해 다른 모든 해석들을 파괴하려 드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말하듯, 하나의 원리가 승리하도록 하자면 또 하나의 원리를 타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승리에 대한 요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파괴적 진실 규명에는 물론 기준점이 필요하다. 하나의 카메라를 잡고, 그 렌즈에 조사되는 그림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그러한 관점은 오랜 기간 여러 가지 관념의 영향을 받아 왔지만, 근대 이래의 종교라 하면 하부구조를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 시대의 광신적 사랑을 받는 종교, 즉 현실이라 불리는 렌즈이자 플라톤적 동굴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술했다시피 저자가 그 자신의 단편적인 명제들을 작품에 투영시키고 있는 사실을 알지만 그 명제들이 무엇인지는 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시점의 인공적 다각화를 꾀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저자와 둘만이 존재하는 세계정신 속에서 영지식 증명 게임을 하는 셈이다. 저자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전하려 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사실의 정합성을 분해된 개별 명제들보다 우선해서 판단하게 된다.

차이와 반복

이러한 영지식 증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는 매번 미묘하게 달라진다. 그 차이가 바로 증명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모든 독서는 유일무이한 경험이다. 재독이 중요성을 가지는 이유다. 그 차이 속에서 태어나는 관념 또한 그 독자만의 것이다. “The original context of this directly lived reality cannot be reestablished.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G. Debord)” 그것은 어떤 타인의 관념과도 결합될 수 있지만 온전히 그 정보를 손실 없이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순간 지식의 소규모적 재생산이 발생하며, 독자는 한순간 저자의 편린이 된다. 그것은 클로드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처럼 이어지며, 저자와 독자는 모두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작용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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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존재론

가령 현재의 쓰레기가 시간이 더해져 현재와 다른 가치가 쌓이게 되는 과정이나, 한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용도 폐기되는 과정들을 우화처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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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panya는 그런 면에서 탈영토화의 만화가라 할 수 있다. 그의 만화를 읽다 보면,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물들이 급격히 귀엽고 친근한 형태를 띠거나, 반대로 기괴하고 코스믹 호러적인 행태를 보일 때가 있다. 그러한 성질은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캐릭터에 대비되는, 극도로 치밀하지만 원근법을 무시하며 흔들리는 배경이라는 기제를 통해 더욱 강조된다.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계는 급작스레 주인공을 이방인으로 만들고, 그 불안과 초조는 극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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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여행’의 중반부에서부터 주인공은 조력자인 돌고래에게 길안내를 받는데, 돌고래는 주인공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공이 돌고래로부터 공포감을 느끼는 순간, 돌고래는 배경과 같이 세세하게 묘사됩니다. 주인공의 내면에서 돌고래는 의지할 만한 길잡이에서 무섭게 하는 존재, 배경과 같이 낯설고 무서운 대상으로 탈바꿈한 것이며 이에 맞추어 묘사 방식도 바뀐 것입니다. 마지막 컷에서 주인공은 공포감을 해소하고자 손을 잡아달라고 요청하고, 이에 돌고래는 수락하며 다시 친근한 존재로 바뀌고, 묘사 방식도 단순하게 돌아가는 것을 통해 판판야가 자기 만화 기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 드보르, 스펙터클, 도시산책자

기 드보르(Guy Debord, 1931–1994)는 그러한 방법으로 신비를 지키려 한 많은 이들 중 한 명일 것이다. 드보르는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Situationist International, SI) 의 핵심 인물로, 현대 소비사회와 대중문화의 작동 방식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스펙타클의 사회(La Société du spectacle)』는 20세기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람, 이미지, 소비가 어떻게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고 인간 소외를 강화하는지 설명한다.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마을.
그곳은 사람들이 모이고, 태어나고, 자라나고, 천명을 다하는 곳.
하지만 신의 부주의로 인한 것인지 흐트러진 자도 있다.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서머타임 레코드

Panpanya식 상황주의

반면에, Panpanya의 작품은 도시구획의 저변에 깔려 있을지도 모르는 의도에는 관심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부 구조에 대한 압도적 무시가 이 작품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키사라기 역은 존재하지 않지만 어쨌건 내릴 수 있는 역이며, 이는 심리지리(psychogeograph)와 무관하지 않다.

드보르는 스펙터클에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Panpanya는 관심도 주지 않는다.

이리하여, 만화는 지극히 평화롭고 소박한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유물론적 상품화에 손 한 번 대지 않고 기괴한 공격을 가한다. 이는 몇몇 일본 작품들의 특기분야이기도 하다. 당신이 만화를 읽으면서, 분명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러브크래프트적인 섬칫함을 느낀다면, 바로 그 공격이 당신에게 본능적 위화감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리라.

여기서 돋보이는 무관심의 철학은 돌려 말하기의 파괴적 특성과 닮았다.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집에서 할 일이 없는 것 같다고 꼬아 말하는 편이 강력하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매우 슬펐다고 묘사하기보다, 그 거꾸로 신어 버린 신발을 비추는 것이다. 듣는 이가 해석하는 만큼 사고적 품이 드는, 비교적 원자화되지 않은 명제들은 일단 해석되면 그 씹고 소화시킨 과정 탓에 기억에 더 깊이 남는다. 인간은 이다지도 리추얼을 사랑한다.

Panpanya는 도시산책자일까? 그것은 정의에 따라 다를 것이다. 도시 속을 느긋하게, 중대한 목적 없이 떠돈다는 최소한의 정의를 적용한다면 도시산책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눈이 보고 있는 것은 도시의 저변에 깔린 인간들의 의지와 욕망이 아니다. 그 만화에서 주인공 이외의,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들은 그 얼굴이 소화전, 파이프 등의 사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그 모든 것이 도시의 기계적이고 신체적인 (corporel) 일부로 환원되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면에서 Panpanya는 도시 속을 걸으면서도 그 도시를 위에서, 바깥에서 부감한다. 그것은 마치 도시 밖의 골목을 따라 걷는 것과도 비슷하다. 캐릭터와 배경의 지속적인 괴리는 이 가설을 좀더 확실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게 Panpanya의 상황주의는 도시를 표류(dérive)하는 것을 넘어, 아예 새로운 현실을 도시 외곽과 사각지대에 구축해 버린다. 그것은 스펙터클을 피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다. 작품에 수없이 등장하는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가 좋은 예시다.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는 일본에서 실존하는 상품이지만, 만화 속에서 그 상품적 요소는 비웃듯이 무시된다. 마치 특정 지역에서 출몰하는 미확인 생물체나 다름 없는 묘사가 상품 위에 덧씌워진다 (해당 제품은 필자도 찾아다니다가 포기한 사례가 있다. 새벽 1시에 만화를 읽다가 공업 단지 어딘가에 위치한 데일리 야■자키를 찾으러 집을 나섰던 것이다. 결국 찜케이크는 찾지 못했다). 상품의 논리는 초등학생들의 츠치노코 찾기 같은 놀이적 구조로 대체된다. 산책 중에 발견한 것들은 텍스트화된 신비로써 기능한다. 이것은 상품을 텍스트로 전환시키고, 인간을 구조로 환원시키며, 도시를 텅 빈 외곽에서 다시 부풀리는 기묘한 상황주의이자 가장 소박한 초월주의로써의 전유(détournement)다.

정리

작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무형의 관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텍스트로부터 유추할 수 있으나, 애초에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관념은 명제의 구조 속 어딘가에 잠복해 있으며, 그것은 세계의 논리적 형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텍스트 구조 속에서, 독자의 해석이라는 반복적 사건을 통해 출현한다. 이 출현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이루어지는 차이의 증명이다. 따라서 panpanya의 만화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침묵으로 지키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무형의 관념을 반복과 차이를 통해 독자에게 증명해 보이는 하나의 영지식적 예술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 그 그림은 현실과 논리 형식을 공유하지 않는 불완전한 그림이다. 이때 관념은, 명제로서 표현되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론적 무게를 가지는 감응의 잔상이다. 더 나아가, 그 차이와 반복 자체야말로 우리가 논하는 무형의 관념에 가장 가까운 것이리라.